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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바닷가교회목사의 성경과 신앙이야기 3 --거듭난 자라야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김여수컬럼니스트 | 승인 2019.11.22 11:3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여기서 물은 곧 죽음이다.

  우리는 앞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from the heaven)’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곧 가치관의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하였죠. 사실 이것은 어려운 말 같지만 쉬운 말입니다. 그러나 행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실존적인 인간이지만 거듭난 후에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존이란 식량과 생식(sex)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상적이란 이념이 삶의 가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날의 국가적 제도를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는 실존주의 사회이고 공산주의 사회는 이상주의 사회입니다. 그러고 보면 체제 자체로만 보면 자본주의 사회보다는 공산주의 사회가 더 기독교적 체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는 실패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실존을 무시한 이념체계로 사회를 조직화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는 호리병속의 닭이 밖으로 나갈수 없듯이 아무리 자기들이 이상주의 사회를 부르짖는다 해도 결국은 실존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말은 이상사회를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보다 더 탐욕으로 빠져 들어버리게 됩니다.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이상이 실존을 이끌어가는 형태로 둘이 다 공존하는 방식입니다. 즉 실존이 이상을 지도자로 따라가야 건전한 사회가 됩니다. 그러나 그럴려면 먼저 이상이 삶의 가치가 되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이상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는 어떠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그토록 잘 아는 유대인들도 실존이 삶의 중심가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율법은 단지 실존적인 삶을 정당화 시켜주는 도구가 될 뿐이었습니다. 즉 주객이 전도되어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라야 하나님의 율법적 가치가 실존을 이끌어가는 형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옛적 이스라엘만의 모습일까요?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도 이렇게 살아가지요.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제로는 삶의 가치에서는 실존이 우선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진실로 거듭난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존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위에 서게 되어지니까요.  이것이 마 7장에서

‘내게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 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이 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존과 율법이 동시에 어우러져야 하는데 실존을 중심하는 사람도 율법을 말하고 율법을 중심하는 사람도 실존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냐 하고 묻는다면 참 대답하기가 곤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죠.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 ’

이 말은 참 해석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뜻으로 보면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거듭난 사람은 바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람과 같다는 것은 단지 느낄뿐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거듭난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 이해를 못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합니다.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일반인에게 하라고 하면 참 이해가 안되죠. 매주일 교회가서 돈내고 목사님께 말씀듣고 돌아옵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봉사다 뭐다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전 모 배우께서 500억의 돈을 사회에 기증하고 자신의 관에는 성경책 하나 넣어주라고 했다죠. 이러한 것들이 세상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까요? 바로 삶의 가치가 실존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이렇게 하지는 못하죠. 그것은 왜 그럴까요?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유익을 포기하기도 하고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하나님의 법도 포기해 버리죠. 이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성경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혹은 ‘성장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은 거듭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물이란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죽음입니다. 노아의 홍수때 온 인류가 죽어버렸죠. 이것이 죽음의 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옵니다. 이때 홍해가 바로 죽음의 물이죠. 그러니까 물로써 거듭난다는 말은 죽음으로써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죽어야 산다는 것이죠.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세례로 표현합니다.

  그럼 정말로 사람이 물에 빠져서 죽는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실존 중심의 삶이 죽어야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날 때 한번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즐겁게 소풍가는 마음으로 춤을 추면서 홍해를 건넜을까요? 아니죠. 양쪽에는 물이 쌓여 있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쫒아오고 거기에다 애들이나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 거치른 바람소리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죠. 그렇게 밤새내내 이스라엘은 그 아수라장의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죠.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에야 그들은 홍해에 둥둥 떠오르고 있는 애굽군대의 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이스라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이 모세와 여호와를 믿었더라.’

 사실 이 장면을 생각해 보면 기가막힌 장면이죠. 자신들이 사백년동안을 살아왔던 애굽을 떠나왔습니다. 죽는 고비를 간신히 넘겼죠. 한 마디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엔 새로운 삶의 가치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와 모세였죠. 실존의 삶이 중심이 아닌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경험이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려면 먼저 하나님이 보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럴려면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바다를 건너면서 자신들의 실존의 가치가 죽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세워졌듯이 너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이때 물어봅니다. 그럼 니고데모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과연 거듭났을까요? 사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죠. 물론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는 고백했지만 예수님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는 믿었지만 그러한 메시아가 이룰 나라는 정치적인 나라 곧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창칼을 들고 로마로 진격하는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진짜 메시아로 진심으로 고백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후 성령의 강림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백성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져 버립니다. 특히 열두사도는 절망 자체였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은 다 장관자리 하나쯤은 차지할줄로 알고 있었다가 예수님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셔 버리자 얼마나 좌절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어도 귀담아 듣지 않았죠.  그들의 마음엔 이미 다윗왕과 솔로몬 왕시대의 보좌와 금은보화가 마음에 가득차 있어서 다른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시자 그러한 희망들이 다 무너져 내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삼일만에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혼돈스런 상황에서 당황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이 승천하신후 성령이 임하시자 완전히 태도가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이후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 사도요한을 제외하고는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때에야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는 것을....

  김여수<심리학 박사>

 

김여수컬럼니스트  kkadang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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