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크래딧이 올라가는데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던 영화… 안옥윤(전지현)의 크로징 신이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까지 잔상이 남아 괴롭히던 영화… 더운 땡뼡에도 활기찬 도시 도로에 길게 늘어선 자동차와 사람들에게 “지금 이 자유로움이 행복한가?”라고 묻고 싶은 영화… 암살은 내게 그런 영화로 남았다.

▲영화 암살 © 임두만

“지붕에서 비가 새고 벽이 무너져 내려도 집을 고치지 않은 이유를 알아요?”
“왜 그러는데?”
“곧 해방이 되면 돌아갈 건데 그때까지만 살 면 되지 뭐하러 고쳐? 이런 생각들이죠”

해방이 되면 돌아갈 나라가 있으니 지붕에서 비가 새도 그냥 버티는 ‘해방’이란 희망 하나로 사는 사람들에게 그 희망을 현실로 돌려주려는 사람들은 ‘독립군’이다.

“왜 그랬냐고? 해방이 될 줄 몰랐지”

동료를 배신하고 일제에 복역한 염석진(이정재)은 다시는 ‘해방’은 없을 것으로 알았기에 ‘밀정’이 되었단다. 이 두 가지의 대비되는 현실이 오늘 영화 ‘암살’이 내게 해준 이야기다. 이승만이 몰락하자 “그렇게 될 줄 몰랐지” 박정희가 죽자 “그리 쉽게 죽을 줄 알았어?”라는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 이땅 주류로 살고 있음을 염석진은 영화에서 알려준다.

“어이 3천 불… 우리 잊으면 안 돼?”

영감(오달수)의 마지막 말, 이 대사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한마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들을 잊은 지 오래다. “친일파가 뭐 어때? 그들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일제 36년이 근대화를 앞당기는 요소가 된 것은 분명하잖아?” “당시 살기 위해서 암묵적 친일 안 한 놈 있어?”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주류’라는 호칭을 듣는다.

“나 끝까지 갑니다”

암살단으로 이끄는 염석진에게 “왜 하필이면 난 지 모르겠네? 처자식이 없다 이건가? 그것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 돈 한 푼 없이 이러는 거는 좀… 흐흐."라고 말했던 속사포(조진웅)가 거사를 말리는 아네모네 마담(김혜숙)에게 했던 “끝까지 간다”는 말. 이는 독립군에게 “끝까지…”가 어떤 의미인지 알려준 말이었다.

“대장, 우리 성공한 거지? 드레스 입으니까 이쁘네. 먼저 내려가 이따가 일 층에서 보자”

속사포는 끝까지 갔다. 그러나 그의 끝은 그가 원하고 암살단을 보낸 임시정부가 원하는 끝이 아니다. 그를 끝으로 이끈 이는 그를 암살단으로 이끈 밀정 염석진이다. 안옥윤과 1층에서 만나지 못하고 끝까지 가버린 속사포의 마지막 말… 그 여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최동훈 감독은 영화적 기법을 제대로 활용했다. 속사포가 던진 수류탄이 불발로 그친 것, 그것은 암살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암시다. 수류탄의 피식거림은 여러차례 카메라에 잡힌다. 피식피식… 나는 이 불발탄의 피식거림에서 우리 역사의 실패를 봤다. 아마도 이 영화를 연출한 최동훈 감독 또한 우리 역사에서 처절하게 실패한 반민특위를 그림으로 알려준다. 이 반민특의의 실패를 말하기 위해 이 장면을 여러 번 카메라로 잡은 것은 아닌지…

염석진에게 재판장이 묻는다

“직업은?
“경찰입니다”

밀정 염석진은 그새 경찰이 되어 있었다. 그랬던 염석진이 자신은 독립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웃통을 벗고 강변한다. 왜곡된 역사를 강변하듯… 이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나오면서 염석진은 경찰 부하들에게 깍듯한 예우를 받는다. 염석진의 무죄 이유는 ‘증거부족’이다. 그런데 검찰이 내세우려 한 증인은 법정 증인 대기실에서 ‘암살’을 당했다. 밖에는 반민특위 반대와 북진통일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이들을 배경으로 경찰은 염석진을 환송한다.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엔딩이다. 역사도 죽일 수 없고 재판으로도 벌을 줄 수 없었던 변절자… 그래서 역사 안에서도 펄펄 살아서 숨쉬며 이제 그 역사까지도 왜곡하기를 서슴치 않는 수많은 ‘염석진’을 영화로만 죽일 수 있다. 그래서 더 고맙다. 영화가 현실 그대로를 담아 그 염석진이 지금도 살아서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극장을 나서는데 더욱 슬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해방이 될 줄 몰라서’ 변절하여 ‘출세’한 염석진, 그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바람에 펄럭이는 수많은 광목들... 수십 장의 길다란 광목이 펄럭이는 벌판, 저 허망한 광목들은 해방 후에도 꿈을 이루지 못한 슬픈 넋들이며 환멸의 깃발로 내겐 보였다. 아마도 최동훈 감독의 의도가 관객들에게서 내가 느낀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면 최감독은 천재다.

2시간 20분의 런닝타임인 이 영화는 런닝타임 중 여러번 “잊지 말라”고 말한다.

1. 영감, “어이, 삼 천 불, 우리 잊으면 안돼, 잊으면 안된다~ 알았지?”
2. 김원봉 “많이들 죽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지겠죠?”
3. 안옥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나는 이 말들이 들리는 통에 영화가 끝난 뒤 나온 도로에서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잊혀졌으며 지금도 잊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라서…

“우매한 민족들이 깨닫게 하려고 했던 거야.”

강인국이 죽어가면서 했던 말이다. 딸의 결혼식에 총독이 오지 않아서 화가 난 강인국은 컵을 던지며 “총독이 왔어야 최고가 되는 것인데…”라고 했다. ‘최고의 친일파’가 되는 것이 목적이었던 강인국, 그가 자신의 친일에 대해 “우매한 민족들이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 나라는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없다”고 말해도 그것이 당당한 시대다. 그렇게 지금 이 땅에는 수많은 강인국 염석진이 살고 있다. 아버지가 친일파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한 정치인이 영화 엔딩 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를 수 있는 시대…

그래서 나는 더 부끄럽다. 저들이 저토록 당당하게 활보하는 나라가 부끄럽다. 황덕삼에게 속사포에게 안옥윤에게…하와이 피스톨에게, 독립군들에게…죄를 진 것 같아서 부끄럽다.

임두만 컬럼니스트  shina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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