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조간신문에는 일제히 중국의 최고지도자 시진핑 주석과 일본 아베 총리가 활짝 웃는 사진이 실렸다. 한국과 함께 일본의 침략전쟁과 아직도 이를 반성하지 않는 몰염치를 강력하게 성토했던 중국이었다. 특히 아시아의 맹주를 넘어 세계지도국을 자임하면서 역사와 인간존엄 명분을 이렇게 쉽게 내던진 중국의 표변(豹變)이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대국(大國)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가치와 철학이 있어야 한다. 중국 정부도 이를 모를 리 없다. 더욱이 지금 중국은 세계열강들 눈치나 보며 암중모색하던 시기도 아니다. 그런데도 중국은 일본과의 냉전에 더 이상 집착하기보다 실익(實益) 우선으로 키를 바꿔 잡았다. 시진핑은 불과 5개월 전인 작년 11월 APEC회의에서 아베 일본 총리를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미소를 짓지 않았다.

일본의 과거사왜곡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어떤 외교적 수사(修辭)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엊그제 시진핑은 줄곧 웃는 얼굴로 아베와 대화했다. 비록 이 자리가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일본의 참여를 희망하는 자리였다고 하지만, 시 주석의 이날 행동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아베도 이날 시 주석의 환대를 의식했는지 “일본은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 투자 수요를 알고 있다. 중국과 AIIB를 토의하겠다”고 화답했다. 이를 두고 중국과 일본, 세계 주요국은 하나같이 중일 양국의 관계개선에 물꼬가 트였다는 반응이 나왔다. 역사·영토 문제와 경제·외교를 분리하는 ‘투 트랙' 전술을 본격화하려는 것으로도 읽힌다. 우리가 일제45년의 늪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인을 우리는 한때 되놈(뙤놈)이라고 했다. 경제적인 이익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돈의 노예로 봤기 때문이다. 나라는 대국일지 몰라도 국민 개개인은 돈에 지나치다고 할 만큼 억척을 부린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시 주석의 이번 표변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고,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대비하지 않았다. 중국이 언제라도 대(對)일본 외교전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약게 굴었어야 했다. 역사와 영토 문제에 대해선 중국과 한목소리를 내면서도, 경제와 외교에 있어서는 중국과 별개로 대(對)일본 물밑접촉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외교적 결례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과 대립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중국 역시 한국 이상으로 역사와 영토에 있어서 대일 앙금이 깊다.

일본 오키나와 남서쪽 동중국해에 위치한 다오위다오 섬은 중일 영토분쟁의 중심지다. 중국 내에서 반일시위가 벌어지면 단골로 등장한다. 중국 명 다오위다오는 일본 명으로 센카쿠다. 우리 땅 독도를 일본이 다케시마라 부르는 것과 너무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우리와 달리,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다오위다오는 중일 관계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나 다름없다. 역사적으로 위안부문제가 한일 간에 풀 수 없는 영구미제라면, 중일 간에도 난징 대학살이 엄존하고 있다. 역사와 영토 문제에 있어 한중이 대(對)일 노선에서 공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공통분모다.

그런데도 중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쫓아 일본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와는 일체의 상의가 없었던 것은 물론, 지금껏 어떤 신호도 주지 않았다. 대일공조나 명분도 중국 주도로만 계산했지,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국제관계는 영원한 우군도 적도 없이, 오직 자국이익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는 정글게임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우리 정치권에서 중일의 관계개선을 우려하거나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한다는 움직임은 찾아볼 수도 없다. 성완종 리스트를 둘러싼 공수와 의석 4석이 걸린 보궐선거에만 목을 매고 있다.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집권여당이 4석을 다 날린다고 해도 뭐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야당 역시 4석을 용케 다 거머쥔다고 해서 차기 대권이 그저 굴러들어올 리 만무하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냉소를, 이런 야바위판과 같은 선거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성완종 사건도 바로 야바위정치가 불러왔다. 구린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선거판에 성완종과 같은 권력불나방은 언제라도 꼬이기 마련이다.

“돈을 단 한 푼이라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국민의 절대다수는 안 먹었는데 이름이 올라갔겠느냐 데 방점을 찍고 있다 성완종이란 사람에 대한 평가와는 관계없이 정치권 전체를 한통속으로 보기 때문이다. 주력산업의 경쟁력이 반 토막으로 떨어졌고, 청년실업자는 길거리에 차고 넘치는데 리스트 한방에 모든 것이 묻히고 있다면 실성(失性)한 나라가 아니고 무엇인가.

리강영 편집장  shina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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