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또 ‘사고’를 쳤다. 연로하신 분들이라 가끔 현실 감각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넘어가곤 했는데 지난 6월 ‘교복 음란물 모두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아청법) 위반’ 이라고 합헌 결정 내리신 다음에 다시 한 건을 하셨다. 사실 ‘교복 음란물 모두 아청법 위반’ 판결도 말이 안 되는 결정이지만 워낙 성(性)에 대해 고루하신 분들이라 백번 천 번 양보해서 넘어가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헌법 기본 정신을 스스로 부정하시는 ‘참신한’ 결정 하나를 내리셨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7월 30일 “선거운동기간 언론사 게시판에서 흑색선전이나 허위사실이 유포될 경우 정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며 선거운동 기간 인터넷 실명제는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실명 확인이 선거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선거 때문에 실명제는 꼭 필요하다는 논리다. 아시다시피 인터넷 실명제 자체는 이미 위헌 판결을 받았다.

지난 2012년 8월 헌재는 인터넷 실명제를 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리고 그 주된 이유로, 인터넷 실명제로 인한 자기검열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 고 판단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정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선거 기간에는 더 활발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한없이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선거기간 중에 입 다물고 있으라고 점잖게 충고하신다.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위해 꼭 필요한 표현의 자유가 선거의 공정성이라는 절차적 과정의 하위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다. 돈 더 벌기 위해 뽑은 알바가 속 썩이는 바람에 가게가 문 닫게 됐다. 어르신들께서 민주주의를 잡아먹는 귀신 하나를 부활시켰다.

법은 주권이 미치는 물리적 영토를 장악해 그 공간에서 호흡하는 사람들에게 질서를 강요한다. 법과 물리적 공간은 하나의 짝이 되어 공간 탈출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속박한다. 물리적 공간에서는 현실 법을 도피할 가능성이 없다. 물리적 공간은 하나뿐 이고 인간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그 물리적 공간 안에서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꿨다. 공간은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으로 분리되었고 사람들은 두 공간 모두에서 호흡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든 새로운 공간에서는 현행법의 구속력이 낯설기만 하다. 공간의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은 끊임없이 현실의 물리적 공간을 재구성해왔다. 예를 들어 보자. 매스미디어만 존재하던 사회에서는 매스미디어를 건너 뛰고 사회와 소통할 가능성이 없다. 권력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주권이 미치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호흡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법의 단두대가 혀를 내밀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매스미디어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팟캐스트와 같은 일인미디어도 있고 SNS도 일상화되었다.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의미없는 수동적 덩어리, 즉 매스 Mass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보의 수신자고 발신자이면서 동시에 정보 제공자다. 매스 미디어 시절에는 방송법을 근거로 방송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탈매스미디어 시대에는 법으로 통제할 수가 없다.

헌법 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아직도 법으로 방송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매스미디어 시절의 폭군을 연상시킨다. 공간이 이원화되고 확장되면서 법의 구속력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무리한 결정을 내리셨다. 헌재의 이 결정은 일정 시기가 지나면 실질적으로 무효화될 가능성이 크다. 가상 공간의 네트워크는 다면, 다층적이라 어느 한 곳이 폐쇄당하면 이내 새로운 연결망을 구축한다. 그 속도가 LTE 급이다.

법이 국회에서 오랜 시간 숙면하는 동안에 네트워크는 무한정 그 공간을 확장시켜 간다. 원래 법은 예방적 속성보다 사후 관리적 측면이 강해 현실과 일정 정도 지체 현상을 보일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현실 감각은 있어야 사회적 설득력을 인정받는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최소한의 상식도 현실 감각도 결여된 올드 보이들의 우렁찬 행진곡이다. 좌향좌 우향우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된다. 어렸을 때 배운 제식 훈련의 기억이 참 오래도 간다. 이 5G 시대에…

김홍열 (성공회대 교수)

김홍열 성공대 교수  shina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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