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을 맞았다. 중요한 것은 숫자만은 아닐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부터 2015년 8월 15일까지. 한국 사회가 마주해야했던 변화와 변혁의 역사들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활자를 넘어서는 '격변'이었다. 정부가 부랴부랴 '임시공휴일'을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경기 부양'과 함께 강조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이런 식의 기념이야 말로 그 격변의 의미를 가장 협량하게 박제화하는 방식일지 모른다. <미디어스>는 오늘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오늘의 문제로 끌어들이는 글들을 싣는다. 북한의 지뢰 도발과 아베의 질주, '대국굴기'를 향한 중국의 욕망과 여전한 미국의 위세 속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대한민국'이 진짜 회복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 편집주-

광복절은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받은 날이다. 독립운동의 괄목할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의 이런 저런 사정 속에서 다소 갑자기 찾아온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광복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근대질서를 정초하는 가장 영향력이 큰 사건으로 남아있다.

광복은 특히 아시아의 제국주의 맹주였던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한국인들의 자주성을 회복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물론 이는 짧은 착각이라는 게 금방 드러났지만 말이다. 미국, 중국, 소련 등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이런 저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겪은 한국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새로운 제국주의 논리에 휘말렸다. 결국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의 계기가 된 이데올로기적 대립 구도에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전략적 접근의 결과가 더해지면서 문제는 더욱 더 꼬여버렸다.

따라서 오늘날 광복의 정신을 되새긴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꼬여버린 역사의 매듭을 푸는 일이며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상호 호혜적인 평화체제를 안착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이루는 핵심 고리는 결국 가해자였던 일본이 과거를 어떻게 평가하고 주변국들에게 어떤 입장을 밝히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간 증폭돼 온 민족감정은 주변국 모두가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없는 지경의 조건을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 장기간에 걸친 불황의 여파를 기득권이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함으로써 ‘혐한류’나 ‘재특회’로 대변되는 극우적 민족감정이 전면에 대두됐다. 보통국가화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근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을 위한 안보 관련 법안 개정을 추진하면서 일본 시민사회에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일고 있지만 여기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통한 평화헌법 무력화에 반대하는 흐름의 구심이 되고 있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이 국제 분쟁이 끼어들 경우 필연적으로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일본 국민들이 목격해버렸다는 것이다. 올해 초 이슬람국가(IS)가 일본이 서방의 IS 격퇴 작전에 2억 달러를 지원한 점을 문제 삼으며 일본인 인질 고토 겐지와 유카와 하루나를 참수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재정적 지원에 대해서도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는 판국에 집단적 자위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게 될 경우 벌어질 끔찍한 일들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일 것이라는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자위대를 확대 개편할 경우 징병제에 준하는 대대적인 병사의 보충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징병제 도입에 대해 ‘위헌’이라며 사실무근이라고 답변하고 있으나 사병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재 자위대의 문제가 강조되면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징병제 도입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세 번째는 ‘평화헌법’이라는 존재 자체를 어떤 국가적·민족적 자랑거리로 여기는 분위기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평화헌법을 수호하자는 취지의 대중적 슬로건으로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로서의 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망각의 논리’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즉, 애초에 평화헌법이 제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평화헌법을 훼손하려는 아베 신조 총리에 정치적으로 반대하면서 국가적·민족적 자긍심에 초점을 맞추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평화헌법’을 국가적·민족적 정체성과 연결 짓는 또 다른 민족감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부분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전제 조건들을 착실히 쌓아나가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일본 사회의 기저에 이런 욕망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민족감정으로 보자면 식민 지배를 당했던 한국을 놓고 할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되새겨 볼 것은 단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싫어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배의 경험이 이후 한국사회의 수많은 것들을 규정하고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과거 박정희 정부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이후 경제 부흥을 위해 경제기획원을 설립해 국가 주도의 수출경제를 확립하고 고도성장을 이룬 것과 갑작스레 발표된 중화학공업화를 밀고 나간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전후 경제 재건에 대한 일본의 경험을 참고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특수로 경기를 되살린 일본처럼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이 양민학살 등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비로소 일본과 한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제국주의에 중요한 고리를 자임하고 있는 주체로서 입지를 분명히 하게 됐다. 즉, 광복의 의의를 현재에 되살리는 것은 단지 국내에서 일본의 잔재를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식민 지배의 경험으로 인해 생겨난 악습과 오류를 직시하고 이를 어떻게 생산적 틀에서 바로잡을 것인지, 이를 통해 어떻게 동아시아 민중 전체의 이익 향상을 도모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고민하려면 북한 문제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북한과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만히 있으면 외교적으로 고립된다는 딜레마를 공유하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한 독재국가라는 점에서, 일본은 과거 침략국으로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받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이 두 국가는 어떻게든 외교적 틈을 찾아내 주변국들과의 밀고 당기기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만일 모든 주변국들이 북한 문제에 대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아예 북한과 일본 양측이 ‘직거래’를 통해 협상력을 확보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인 셈이다.

우리 정부의 입장에서는 북한 문제의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주변화 돼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달갑지 않다. 특히 중국과 일본·미국이 남·동중국해에서 직접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우리 정부에 남은 외교적 카드는 북한 문제를 고리로 한 것밖에 남지 않게 된다. 특히 미국과 일본이 ‘신밀월관계’를 구축하고 일본 침략의 과거사와 관련한 모든 쟁점을 무력화시키려 하는 시도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현재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외교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전방에서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이 일어났음에도 우리 정부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근래 정치·외교적으로 가장 고립된 처지에 놓여있다.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북-중 당국자 간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고립의 예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공은 옆에 있는 우리 정부로 넘어올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중재자’로서의 중국의 역할을 복원하고 미국을 설득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실질적 행동에 나서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ARF 참석 중에 “미국의 목표는 북한 사회주의체제 제거”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자청하기도 했는데, 뒤집어 보면 북한의 현 체제 보장을 위한 미국의 역할을 주문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결국 9월 전승절 행사 참석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10월에 한미정상회담을 진행하는 일정이 유력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북한에 일종의 ‘싸인’을 줘야할 필요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정부가 북한의 지뢰 도발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도 북한에 고위급 회담을 열자는 전통문을 보내 수차례 접수를 요청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진행된 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상회담 등 주요 일정에서 북핵 문제 등을 비중 있게 다룰 것임을 언급하면서 북한이 최소한 대화 테이블에 나오도록 유도해야 다음 단계를 기약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춰져야 아베 신조 총리가 종전 70주년 기념 담화를 통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충분히 언급하지 않더라도 외교적 교착상태가 벌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지뢰 도발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아마추어적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온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를 쉽게 장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고 일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대로 어설픈 시도로 남북관계를 더 망치지 말고 현행 유지라도 하라는 주문을 하기엔 임기가 너무 많이 남았고, ‘한-미-일 대 북-중-러’의 외교적 교착을 피하기 위해 정부가 움직임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은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에 디딤돌을 놓는다는 사명감을 갖고 외교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번에도 ‘패션쇼’ 정도의 성과에 그치고 만다면 광복 70주년의 의의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리강영 편집인  lgy55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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